자화상 고래의 삶을 표현하다, 오랜지바다 마을 작가 차푸름
"움직일 수도 없었던 고래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제는 색깔도 다양해지고 다른 동물로도 변신하고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이거 뭐 그냥 그렸네'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고래가 색깔과 동작을 획득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바다로 도망간 고래를 그리는 섬유공예 일러스트 작가 차푸름입니다.


- 이곳저곳에서 기묘하게 존재하는 고래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11년 전쯤 네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에서 '원래 고래는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고 추정되는 삽화를 봤어요. 생각과 달리 신기하고 이상하더라고요.  다큐멘터리에서는 고래가 육지에서 기어 다니며 살다가 바다로 들어가서 다리가 퇴화했대요. 무의식적으로 그 이미지의 잔상이 남아있었는데 어느 여름날 제가 고래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유 없는 불안과 게으르고 무기력한 기분에 시달리던 때였거든요. 현실의 나는 뭍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꿈꾸는 이상은 현실과 큰 괴리감이 들었고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고래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래전의 고래는 이런 형태이지 않을까 하고요. 그 이후로 이 생명체를 '고래'라고 부르며 그림을 그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습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 그러면 그림 속의 고래가 진화하고 있다는 건가요?
제 그림에는 '현실'의 고래와 '이상'의 고래가 있어요. 현실 속의 고래는 하늘을 바라보며 무기력한 모습으로 가만히 멈춰 서 있습니다. 대충 하고 싶고 부정적이고 포기하고 싶고 귀찮은 기분으로 가득해요. 이상 속의 고래는 다양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10년 동안 고래를 그리다가 깨달은 건데, 동작이 들어간 고래는 제가 늘 '흑백'으로 표현하고 있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색을 칠하지 않고 몸통을 하얗게 비워둔다는 걸 알았어요. 현실이 아닌 이상일 뿐이라 무의식적으로 색이 없는 상태로 남겨둔 것 같아요.



바다를 꿈꾸며 현실의 뭍에서 머무는 고래들 / <I am Blue. But I'm not blue> 전시 중. 서면 굿굿웨더 엣 더 모먼츠 


-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고래의 다양한 이미지가 탄생하고 있는 거네요.
고래가 여러 가지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 첫 개인전 제목이 <불안의 기록과 형태>였어요. 2014년 12월 28일부터 2015년 4월 6일까지, 마치 일기를 쓰는 것처럼 고래를 한 마리씩 그리고 바느질을 했어요. 매일 고래 한 마리를 생산하는 것. 이걸 해내야만 오늘 하루를 증명할 수 있었던 때였어요. 남들은 일하고 돈을 버는 거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지만 저는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아티스트들은 '자기표현'이 작업을 하는 동기가 되지만 저에게는 그것조차 사치스러웠어요.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서 이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일이었어요. 불안을 덜 느끼고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고요. 피곤하다는 이유로 며칠 작업을 안 해버리면 그만큼 바닥으로 가라앉아버려요. 일주일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떨어졌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해요. (오른쪽 상단 그림 참조) 고래를 그리고 바느질하는 행위에서 삶의 이유를 찾고 싶었어요. 이 작업을 기록해나가는 100일이 인내와 수련의 시간이었어요. 모든 작업 과정에 의미를 두다 보니까 예민해지고 날이 세워지더라고요.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꾸준히 운동하고 밝은 생각을 이어가려고 노력하니 조금씩 저 자신이 안정되는 걸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제 그림을 편하게 감상해주고 좋아해 준 것도 안정감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고요. '즐겁다'라는 기분과 함께 고래의 동작과 색감도 다양해지고 있어요. 우울한 생각을 떨쳐내고 존재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고래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 존재를 해소하는 방법이 꼭 '반복 작업'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공예는 장인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장인들은 같은 작업 행동을 계속 반복하면서 그 기술에 숙달하고요. 제 작업도 그 과정을 흉내 내고 있어요. 처음에는 재봉하다가 종이가 찢어진 적도 많았지만, 나중에는 이 작업에 있어서 장인이 될 수 있었어요. 이렇게 반복하며 숙달하는 과정을 즐기는 성격입니다. 오래전부터 이런 과정 없이 그냥 그림만 그리면 뭔가 이상하고 의미가 없다고 느꼈어요. 이제는 그림과 바느질이 한 세트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작업을 표현해보고 있어요. 재료를 선택할 때 그 무게를 가볍게 해보면 어떨까 도전해보는 중이에요.




공교롭게도 차푸름 작가의 이름(푸름 blue)과 우울(blue)은 같은 단어를 공유하고 있다. 이중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차푸름 작가의 <I am Blue. But I'm not blue> 전시에서 작가와 함께 10년 동안 변화해 온 고래들을 만날 수 있다. (장소: 부산시 서면로 46번길 32 2층 굿굿웨더 엣 더 모먼츠 / 전시 기간: 2019년 8월 7일 ~ 9월 7일)


-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고 고래들을 다시 보니 어느 시기에 탄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만히 서 있는 고래들과 색깔 없이 움직이고 있는 고래들, 그리고 점차 화려한 색상이 담겨 여러 동작이 들어간 고래들, 고래를 바탕으로 뭔가 다른 생명체가 되어 있는 고래들. 자신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캐릭터 속에 이렇게 담겨 있었군요.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가는 오랜 과정이 계속되고 있어요. 작업의 터닝 포인트가 된 아주 작은 원본 그림들이 있는데 제게 너무 소중해서 팔지 못하고 있어요. 이상과 현실이 처음으로 합쳐진 순간이라서요. 움직일 수도 없었던 고래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제는 색깔도 다양해지고 다른 동물로도 변신하고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이거 뭐 그냥 그렸네'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고래가 색깔과 동작을 획득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내가 즐거운 인간이 된 건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5년쯤 더 그리고 나면 삶의 이유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작업 중인 차푸름 작가. 무기력함을 벗어던진 고래가 다양한 동작과 색감을 품고 있다. 


- 이 모든 작업이 시작되었을 때가 궁금해요. 어떤 이유로 '섬유 공예'를 공부하게 되신 건가요?
디자인고를 졸업하고 무조건 경성대를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고등학생 때 입시 미술의 획일성이 견디기 힘들었거든요.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자꾸 특정한 방식으로만 그리라고 하니까 반발심이 일었어요. 그런 것들과 투쟁하다가 막판에 이러다가 대학교도 못 가겠다 싶어서 억지로 외우고 시험 쳐서 들어간 곳이 공예 디자인학과였어요. 제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전임 교수가 부재한 상황이라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수업도 지루했어요. 왜 노란색부터 염색해야 하는지, 왜 정사각형으로 해야 하는지, 나는 다른 거 하고 싶은데 왜 도깨비 문양만 가져와야 하는지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해'라는 식이었지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기법만 가르쳐주는 수업을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학교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건 3학년 때 하와이에서 오신 김지은 교수님을 만나고부터였어요. 카키색으로 염색한 교수님이 뭔가 이상한 걸 알려주시는 거예요. 그물을 짜는 전통적인 기법이었어요. 너무나 색다른 수업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공부하면서 크게 고민을 한 적이 없고 누군가의 작품이 예쁘면 따라 하는 정도였거든요. 김지은 교수님은 '오리지널리티'의 가치를 무척 높게 평가하는 분이셨습니다. 교수님만의 지도 방식에 훅 빠지고 말았어요. 어느 날 교수님께서 1년간 학교를 안 나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무턱대고 휴학을 해버렸어요. 막연하게 다시 오실 거라는 기대가 있었거든요. 1년 뒤에 돌아오니 김지은 교수님께서 전임 교수로 와 계셔서 3학년 2학기부터 졸업 때까지 신나게 작업했어요. 


- 교수님의 존재가 작가님께 영향을 끼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타인의 작품을 읽고 분석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내 것 하나 더 그리는 게 낫지 남의 것을 왜 보지?'라는 생각에 "하기 싫어요!" 하면 교수님은 쿨하게 "응, 그래라." 하시는 분이에요. 유명한 작가들 보면 섬에 갇혀서 맨날 자기 것만 하고 남의 것 보지 않으면서 사니까, 저보고도 그냥 그렇게 살아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예전에는 유명한 작가나 작품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했는데 지금은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교수님은 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해주셨어요. 좋아하는 어른 중 한 분입니다. 고민이 생겼을 때 교수님께 가면, 분명 조금 전까지 심각한 일이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골칫덩어리가 잘게 쪼개어져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제 작업물을 보면 섬유 공예의 전형적인 틀대로 진행한 작업이 없어요. 자수를 하시는 분이 보면 '무슨 자수를 이런 식으로 하냐'고 말씀하시지만, 교수님은 제가 제 기법대로 할 수 있게 놔두세요. 정석은 없으니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놀라고 하십니다. 가끔 너무 엉뚱한 곳으로 흐르면 조언해주시기도 하고요.






- 오랜지바다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예전에 전시를 같이한 강사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누가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오랜지바다 대표님이셨는데 생각보다 늦게 방문하게 되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무 반갑게 인사해주셨고 대표님 특유의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오랜지바다 공간에 제 작업물들을 가져다 놓게 되었어요. 학교에서 전시 기획을 하거나 학교 사람들의 물건을 팔아야 할 때 항상 생각 나는 곳이 오랜지바다였어요. 전시와 크리스마스 세일 전 등을 기획해서 함께 물건도 팔았어요. 제가 부산에 정이 많아서 학교 다닐 때부터 부산과 관련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직접 만든 상품이나 디자인을 대표님께 보여드렸을 때 제대로 불이 붙었어요. 그때부터 오랜지바다의 디자인 일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제 그림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게 넘기는 곳은 오랜지바다가 유일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열정 페이, 재능 기부로 너무 많이 당해서 돈 문제는 확실하게 하는 편인데, 돈 문제를 포함해 민감한 사항들도 대표님과 쿨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요. 제 고래 그림이 분위기가 센 편인데도 흔쾌히 오랜지바다 건물 벽을 마음껏 그려봐라고 내어주셨어요. 파격적으로 저를 믿어주신 거예요. 그때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푸름에겐 힘이 있다. 물건은 잘 안 팔리지만!"


- 작업의 영감은 어디에서 얻는지 궁금합니다.
고래의 동작들은 제가 평소에 하는 행동들에서 영감을 많이 받아요. 고래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행위도 제가 보드를 탈 때 취하는 자세들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평소에 작업하다가 스스로 깨달은 걸 적은 메모들,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들, 그리고 불교 경전인 『아함경』과 좋아하는 노래 가사들에서 영감을 얻는 편입니다. 작업 중에 하나씩 하나씩 삭제하는 과정을 거치다가 마음의 바닥에서 정리된 영감을 발견할 때도 있어요.


- 앞으로 작가님의 꿈은요?
1년에 무조건 개인전 한 번씩 하기. 겨울에는 따뜻한 나라로 가서 사는 것. 이것들을 계속 실행하며 살고 싶어요.●




│글·사진 박채린(chaelinjane@gmail.com)
차푸름
마을 작가
고래가 되어 바다를 품은 섬유 공예·일러스트 작가.